반도체

대한민국 반도체의 역사의 시작과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사업장

Mr.Nuup 2023. 8. 4. 12:34

대한민국반도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의 역사는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수고가 있었다.

먼저 그당시 일본정부는 1975년 '반도체전쟁'을 선포하고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 앞장서 뛰기 시작했다. 정부 300억 엔, 5개 민간기업이 400억 엔을 출자하여 총 700억 엔 규모의 자금을 집중 투자하여 4년 내에 미국을 압도할 수 있는 집적회로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인 VLSI기술연구조합 설립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이 프로젝트는 크게 성공하여 1976년 16K비트, 1979년에 64비트 메모리를 출시한데 이어 다음해인 1980년에 256K비트 메모리를 잇달아 출시하면서 메모리분야에서는 미국을 완전히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세계 시장구조가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역동적으로 바뀌고 있던 1970년대 중후반,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아직 단순 조립공장 형태의 하청생산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부 연구소와 기업가들은 "반도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기본적인 투자규모가 너무 크고 기술개발을 위한 지속적인 투자가 요구되는 반도체산업의 특성상 민간업체의 투자는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외국에서 기술을 도입하려고 해도 이미 반도체시장을 선점한 국가와 기업에서 반도체 기술을 순순히내어줄 리 만무했다. 반도체 한 개를 팔면서도 그 용도를 상세히 캐물었으며, 기술유출을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일정 개수 이상은 판매하지도 않았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가 반도체공정기술 개발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던 때가 바로 이런 시기였다.

정·재계 관계자 설득에 나선 KIET

한국의 민간기업과 정부가 적극적으로 반도체 개발에 나선 것은 1980년대부터였다.1981년 3월 '전자공업육성방안'을 발표한 정부는 가전제품 중심의 전자산업을 반도체와컴퓨터, 전자교환기 등 3대 전략품목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계획을 수립했으나, 이마저도쉬운 일은 아니었다.

새해가 밝았지만 정부와 경제계의 반도체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답보상태였다. 반도체가갖고 있는 기술력과 반도체가 열어줄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 '반도체가 수출에 도움이 되는가? 혹은 '반도체산업을 할 경우 경제에 위험요인은 없는가?', '반도체산업을 하면서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는가? 와 같은 질문만 줄을 이었다.

이러한 정·재계 관계자들의 생각을 돌린 것은 KIET의 연구진들이었다. 이들은 하루가멀다 하고 각 부처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반도체산업에 대해 설명하면서 반도체 공정기술 연구를 위한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1981년 4월, KIET에 반도체 연구동(구미)이 완공됨과 동시에 반도체 제조시설과 장비 설치가마무리되었으며 10월부터 제조시설이 가동되었다. 그리고 차후 반도체 수요가 늘어날것에 대비, 반도체 연구개발에 대한 정부의 관심도 이어져 1982년에는 과학기술처의 특정연구개발사업에 선정되어 반도체 연구는 더욱 활기를 띄었다

반도체산업의 첫 개가, 32K롬 개발에 성공

그렇다면 어떤 반도체를 만들 것인가?

때마침 미국의 VTI사가 기억소자 롬(ROM)을 제안해 왔다. KIET로서는 당시 NMOS 공정을 수립하고 롬(ROM)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VTI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VTI의 장비와 프로세스를 검토한 결과, KIET의 장비와유사하기 때문에 기술만 도입하면 짧은 시간에 양산체제를 구축하는데 유리했다.

1982년 초 VTI에 기술료를 지불하고 이 기술을 도입한 KIET는 같은 해 10월, 국내 최초로 32K롬의 개발에 성공했다. 32K롬은 반도체 기판에 약 4천여 개의 단어를 기억할 수있는 소지를 집적(集)한 제품으로 마이크로컴퓨터, 전자게임, 산업용 로봇, 가전제품등에 폭넓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32K롬의 기술개발을 담당한KIET 연구진은 물론 과학기술계의 신경은 여전히 곤두서 있었다. 만족할 만한 생산수율이 나오기 전까지는 32K롬 개발을 자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이정오 과학기술처장관은 32K롬의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아침저녁으로 그래프를 그려가며 생산수율을 독려했다고 한다.

1983년 1월 VTI의 32KROM관련 기사

KIET는 메모리반도체의 개발 이외에도 8비트마이크로 컴퓨터용 칩(상단)과 VTR IC를개발했다.(위의 기사)
1982년 10월에 완성된 32K롬은 다음해 4월 11일 세계에서 8번째, 개발도상국에서는 2번째로 32K롬의 수율을 국제수준급인 평균 44%, 최고 60%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이는 동일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일본의 '리코' 와 엇비슷한 수준이고, 미국의 ATI 보다는 오히려 약간 웃도는 수준이었다. 44%라는 숫자는 KIET에 32K롬을 제작하기 위한 기술을 판 VTI사가 약속한 보장수율36%보다 8%를 초과한 수치였다. 이 과정에서 VTI에서 제시한 일부 공정기법보다 더 향상된 공정기술을 개발하여 이 기술이 다시 VTI 생산라인에 적용되는 일도 발생하는 등 생산기술 향상에 지대한 발전이 있었다.

“이처럼 짧은 기간 안에 기술이 크게 발전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칭찬을 아끼지않는 외국인 엔지니어의 말에 고무된 KIET는 곧바로 64K롬의 개발에 착수했다. 32K롬에 비해 2배의 집적도로 6만 4,000비트를 기억할 수 있는 64K롬이 완성된 것은 이듬해인 1983년이었다.

KIET에서 수많은 성과를 내었지만 그중 가장 획기적인 성과는 1982년 가을에 반도체 32K롬을 개발해서 연간 4천만 개를 생산해낸 것이다.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이종덕 서울대 교수였다. 연구소장 김정덕 박사는 "연구소가 발족한지 5년째인데 이젠 무언가 보여줄 때가 됐다"고 생각하여 연구소에 전두환 전 대통령과 대기업의 전자산업 관련자 2백여 명을 초청, 개발과정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때 전 대통령이 반도체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는 국내 기업들을 반도체산업에 뛰어들게 한 계기가 되었다. 다음해인 1983년에 64K롬을 개발하는데 성공했고 그 씨앗이 자라서 오늘의 반도체대국으로 성장하는데 기여했다.

이종덕 교수님의 약력


1983년도 절반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중순, KIET의 우대식 박사가 이끄는 반도체개발팀이 개발에 성공한 64K롬은 4.5미크론의 회로폭으로 구성되는, 한국의 반도체생산기술이 VLSI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성공이었다.

 

그당시 32KROM을 성공시킨 ETRI 김정덕박사님의 인터뷰영상과 Youtube Link

https://youtu.be/hEX2POBiXkQ

과학재단 김정덕 이사장 약력
 학력
-1957. 3 - 1960. 2 광주일고
-1960. 2 - 1964. 3 육군사관학교 (이학사)
-1966. 6 - 1968. 6 미국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공학석사 M.S.E.E..)
-1969. 6 - 1971. 3 미국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공학박사Ph.D 전공:전자공학) 경력
-1968. 8 - 1975. 3 육군사관학교 전기공학과 강사, 조교수
-1975. 4 - 1982. 7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실장, 연구장, 전자통신사업단장
-1982. 7 - 1985. 1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소장
-1985. 3 - 1986. 2 금성전기(주) 기술연구소 소장
-1987. 7 - 1991. 8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반도체기술연구단장 겸 기억소자개발사업본부장, 무선통신개발단장, 부소장
-1991. 8 - 1995. 5 전자부품종합기술연구소장
-1995. 6 - 1997. 5 과학기술처 연구개발 조정실장 (1급)
-1997. 6 - 1998. 3 과학기술정책관리연구소 자문위원
-1998. 3 - 1999. 8 하나로통신(주) 부사장
-1999. 8 - 현재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 대표
-1999. 2 - 현재 전자부품연구원 이사 (비상임)
-1999. 2 - 현재 한국과학기술 평가원 이사 (비상임)
-2000. 9 - 현재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 (비상임)
-2000.12 - 현재 제2의 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2기)
-2001. 2 - 현재 대전발전연구원 이사(비상임)
-2001. 8 - 현재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자문위원
-2002. 3 - 현재 과학교육 발전위원회 위원(과학기술부장관 위촉)

 학회활동
-대한 전자 공학회 종신 회원
-한국 방송 공학회 종신 회원
-IEEE(국제 전기 전자 공학회) Senior Member
-대한 전자 공학회 부회장 역임 (1995)
-한국 방송 공학회 부회장 역임 (1995 -1996)
-한국 기술혁신학회 회장 역임 (2000 - 2002)



 

 

이후 계속된 개발 성공으로 기업들이 투자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였으며, 무엇보다 다양한 경험과 숙련된 기술력을 확보하여 향후 대한민국을 반도체 선진국으로 이끌어 갈 고집적 반도체 개발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야말로 64K롬 개발의 진정한 의미라고 할 것이다. 그때 삼성전자 반도체의 근간이 되는 기흥사업장은 1983년 용인시 기흥구 농서동 부지에 세워져 처음 가동도었고. 1984년에는 1라인이 세워졌다. 사업장 건설이 완료된 것은 1984년 3월인데, 평균 18개월 걸리는 공사를 6개월 만에 완료한 이례적인 사례이기도 했다. 1984년 5월 준공식을 시작으로 기흥에서 본격적인 고집적반도체(이하 VLSI) 양산이 시작됐습니다.

 

 

1983년 기흥단지의 당시 전경
1983년 9월12일 삼성반도체 기공기사

여기서 삼성전자는 1983년 2월 VLSI 사업 추진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반도체의 64kb램의 개발착수가 5월이니....개발착수후 바로 9월에 기흥공장에 준공을 시작한것이다., 1983년 5월 64Kb D램 개발에 착수 12월에 성공했다. 이는 전세계 반도체업계에 삼성전자를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대한민국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첨단 VLSI 기술을 보유한 세 번째 나라가 됐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64K DRAM은 우리나라가 IT 강국으로 발돋움하는데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 563호로 지정됐다.

 

1983년 12월 64KD램개발 성공보도기

 


삼성이 64KD램 개발에 성공하고 본격적인 생산에 나서자 일본의 반도체 업계는 덤핑 출하를 불사하며 삼성의 세계시장 진입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본의 조치에 반발한 미국이 거꾸로 일본 업체들에 대하여 반덤핑관세를 부과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64KD램은 개발 이듬해인 1984년부터 양산에 들어가 수출을 시작했다.

삼성이 64KD램을 처음으로 출하한 1984년 반도체산업 사상 최대의 호황이었으나, 1985년 초부터 반도체의 수요가 급격히 감소하고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첫 출하 시 개당 3달러 수준이던 64KD램의 가격은 1985년 중반에는 30센트까지 폭락했고 그나마 판매도 여의치 않았다. 삼성은 무려 1,400억 원이 넘는 누적적자를 껴안게 되었고 인텔마저도 결국 D램 사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언제나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던가, 미국이 일본의 반도체기업에 반덤핑관세를 부과하며 공세를 취하는 사이에 일본의 256KD램 투자와 생산에 공백이 생겼다. 그리고 이는 삼성이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삼성이 개발에 성공한 256KD램 제품


256KD램 개발팀이 구성된 것은 64KD램의 개발 성공 후 3개월 만인 1984년 3월이었다. 국내 기흥공장에서 256KD램 개발팀을 발족시킨 동시에 미국 현지법인 내 연구소에서 개발에 착수하였다. 256KD램은 당시 생산되고 있던 반도체 제품 중 최고의 집적도를 가진 제품으로, 일본의 NEC와 후지쯔, 미국의 인텔 등 몇 개 업체만 생산하고 있었다. 조만간 64KD램의 대체수요로 머지않아 반도체 시장을 석권할 것이 확실시 되고 있었다. 256KD램은 64KD램보다 4배의 집적도를 가진 제품이지만 공정개발의 어려움은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국내 개발팀은 64KD램에서 얻은 경험과 자신감으로 설계 착수 7개월만인 1984년 10월 양산에 성공하였다.

 

삼성이 개발한 256KD램은 기존의 메모리에 비해 회로결함 보정기능이 내장된 특수설계로 수율이나 성능면에서 우수하고 제품수명도 훨씬 긴 것이 특징이었다. 회로결함 보정기능이란 제조과정이나 완제품 사용 중, 특정 소자에 불량이 생길 경우 자동으로 대체 소자로 연결되어 정상기능을 할 수 있도록 특별 회로설계를 한 기능을 말한다. 미국 현지법인도 256KD램의 개발에 성공해서 1985년 7월 양품을 확보하였다.

 

 

 

현재 기흥단지 전경(삼성전자 제공)

 현재 기흥사업장은 삼성의 '파운드리 요람'으로. 삼성전자 반도체의 모태가 됐던 1~5라인이 이곳에 있기도 하고요. 지금은 6라인과 S1이 주축이 돼 파운드리 팹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아래 참조)

 

기흥사업장은 크게 K1과 K2로 나누어집니다.

K1은 말그데로 삼성전자 반도체의 모태가 되는 사업장이고

K2사업장은 삼성전자가 300mm 파운드리 사업을 시작했던 S라인과 6라인등이 있습니다.

K1과K2사이로 올라가면 과거 삼성전자의 중앙연구 역할을 했던 '구)삼성종합기술원' 건물이 있는데

지금은 삼성종합기술원전체가 수원매탄동으로 이전을 했고, 지금은 삼성디스플레이연구소등에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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